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아, 그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다.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다소 마음이 무거워지는 자료들과 함께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40년 전 그 날의 증언과 함께 말입니다. 교과서로만 공부했던 내용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발생배경을 살펴봅시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귄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으로 권력유지의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하였습니다. 그들은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민주화운동세력과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 제물이 바로 광주였던 것이죠.
이번 글에서는 각각의 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 당시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게 된 요지이기도 합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진압과 이에 대한 항쟁주체들의 대응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주의!
다소 적나라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므로 그 부분을 고려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검열해서 사진을 넣긴 했지만, 잔인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기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가정하고 쓴 글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넣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내용을 하나씩 이해하기보다는 그 때의 참상이 어땠는지에 대해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5월 16일
1980년 5월 16일 전국의 대학들이 일단 시위를 중단했다. 그러나 광주의 전남대, 조선대 등 9개 대학 3만 여명은 오후 3시부터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저녁 8시부터 횃불시위를 벌이며 ‘계엄철폐’ 등을 요구했다.
5월 17일
5월 17일 비상국무회의가 18일 0시를 기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하고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등에 대한 예비 검속을 하였으며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을 진주시켜 학생들을 연행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 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그렇게 5월 18일이 찾아옵니다.
5월 18일
5월 18일 아침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들이 교문 앞에서 등교를 저지당하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을 하였으며, 이에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계엄사령부는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했다.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00여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200-300명 정도로 수가 불어나자 학생들은 "계엄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아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X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게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는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 놈들은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5월 19일
5월 19일 새벽 증파된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하였고,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를 방화하였으며,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그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5월 19일에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만행은 어찌나 잔인했던지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시민들에게 울먹이면서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 고 애원할 정도였다."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노인들도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본 시위 군중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일시에 돌아섰다. 그리고는 "좋다,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전남대에서 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사격을 실시한다. 트럭 위에서는 M60이 엄호사격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신역을 향해 다가간다. 사병들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모두 쏴죽인다."
-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운전기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이에 시민들도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저녁이 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죠.
MBC 이외에도 KBS와 세무서도 불에 탔다. 신군부는 이 방화들을 '폭도론'의 증거로 TV 등을 통해 계속 보여주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5월 20일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하였으며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저녁에는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21시 경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이 사망하였고, 21시 50분에는 광주 MBC 건물에 불이 났다. 23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5월 21일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계엄군이 집단으로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장면인데요, 실제 실화입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는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일단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한 정오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후 1시 정각, 건물 외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알리는 신호였다. 광주시민들을 몰살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
"공수놈들은 같은 동족을 살상하고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지 못하도록 연발로 위협사격을 해대었다. 아직도 공수부대놈들의 사격선 부근에서 부상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애원소리는 처절했고, 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피를 끓게했다. 공수놈들은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에게조차 사격을 가해 사살해버렸다. 부근 건물의 벽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

"순식간에 금남로는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져격하였다. 1시 30분경에는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윗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광주만세!' 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모든 시민들이 긴장되어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청년의 목이 꺽어졌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시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이었다. 시민들은 곧 총을 얻기 위해 시내, 외의 무기고로 향했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그렇게 시민들은 무장하게 됩니다.
21일 저녁, 드디어 시민군은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내고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택> (인물과 사상, 2003)
하지만 이는 광주외곽봉쇄작전을 위한 계엄군의 계획이었습니다.
5월 22일
22일 비공식적인 정전이 성사되고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시민 수습위원회와 신군부 사이에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 계엄당국은 김대중을 광주폭동의 배후라고 발표했으며, 일부 특전사 지휘관들은 무력을 동원해 광주 '폭도들'을 '소탕'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윌리엄 글라이스틴,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 (중앙 M&B, 1999),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5월 22일 9시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습니다. 군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는 가운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습니다.
이날 밤 박충훈 신임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철수한 시기의 광주는 치안부재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치공동체’로 단 한건의 강도나 절도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신군부 세력의 중심으로서 당연히 5.18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데에 일선에 서게 되었죠.
전두환은 정석환에게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 자신의 명의로 금일봉 1백만원을 최웅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 정석환, <비화/ 5.18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비망록> (신동아, 1996 1월)
5월 23일
5월 23일 10시 경 시민 5만 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하였고, 학생수습위가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고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를 게시했다. 한편 13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하여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5시에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되었다.
주남마을 버스총격 사건 같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나중에 자세하게 다뤄보려고 합니다.
5월 24일
공수부대원들은 어린 아이들도 가릴 거 없이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학살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입니다.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그리고 이 날 오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들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은 6.25때에도 이런 참혹한 살육전은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모두 죽자' '죽여달라' 를 외치며 짐승 같은 계엄군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고립된 우리 광주 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 김정남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활성서, 2002년 12월)
5월 25일
아침 8시,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21세의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에 쓰러지듯이 허겁지겁 들어닥치면서 어깨를 움켜쥐고는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중략) 독침 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여기저기서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도청 안에는 불안해서 못 있겠다며 상당수가 빠져나갔다...(중략) 이 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서 침투정보요원들의 도청지도부 교란작전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그렇게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됩니다.
5월 26일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고, 10시에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14시에 학생수습위원회가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하고, 15시에는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조치 시켰습니다. 마침내 자정을 기해 시내전화가 일제히 두절되었습니다.
전남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블레들리 마틴은 이 기자회견에서 만난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 임창용 <'폭동'아닌 '민주항쟁' 자리매김 큰 몫 윤상원 5.18 시민군 대변인> (서울신문 1998 9월 10일)
계엄군과 정면으로 맞서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5월 27일
5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 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골목골목을 누볐습니다. 새벽 4시 도청 주변은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에서 시가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시민군들이 모두 정면으로 응사하는 동안 뒷담을 넘어 들어온 3공수 특공대는 도청 건물로 잠입하여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하고 여기저기 수류탄을 까넣었다. 그리고는 확인사살까지 했다. 많은 시민군들은 특공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1시간 후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을 종료했습니다.
그렇게 5.18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후의 모습

광주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
<조선일보>는 5월 25일자 사설에서 항쟁세력들을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으로 몰아붙이고는, "......57년 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린 교훈을 주고 있다..." 며 마치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한 일본인 폭도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 정운현 <'광주의 굴레' 못 벗은 한국언론> (대한매일 2001년 5월 19일)

교과서에서 배웠던 내용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 않았나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다소 무거운 얘기를 해보았습니다. 당시 사진들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이 너무나 잔인하여 최대한 배제하였습니다.
항거한 시민들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해 자신을 바쳐서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 지적이나 비판 환영합니다. 옳지 않은 정보가 있는 경우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시 하나를 보여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오월에서 푸른 시월까지
손현숙 (1969-그룹 천지인 보컬 )
(작사:김현성 작곡:김현성)
따스한 햇살이 나를 부르듯 오월이 왔네
친구는 이야기하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자유를 모르는 자 참된 사랑을 모른다네
그대가 뛰어가는 젊은 거리에 내가 있고
그대가 쓰러지면 내가 다시 뛰어가리
눈부시게 오월에서 푸른 시월의 하늘까지
서로 사랑하며 눈물 닦아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