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출현과 베르사유 체제의 붕괴
히틀러란 누구인가?
히틀러가 권력으로 부상하는 과정은 세계사의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겨지는 일 중 하나이다. 대륙 유럽에서 독일의 부상은 불가피했으며, 그 과정에서의 학살과 죽음은 히틀러 한 사람에 의해서 단행된다. 히틀러는 뛰어난 선동가로서 기존의 철학 학파로 분류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사상은 자서전 Mein Kampf에서 드러나듯이, 분류상으로 우익, 극단적, 보수적이다. 그의 탁월한 웅변 능력은 그가 독일 내부 권력을 장악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심리적인 약점을 잡아서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파고드는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타국의 죄책감을 자극하였다. 이러한 외교 전략은 히틀러 집권 척 5년 내에 가장 큰 성과를 달성하는데, 그 핵심에는 다른 나라들의 리더들이 히틀러의 목표가 베르사유 조약의 기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소박한 타협 수준이라고 오해한데에서 기인한다.
그 후 히틀러의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는 독일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이유는 독일 내부의 내분과 리더들의 의지 부족이라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항상 그의 승리들에서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독일의 자원이 바닥나고 파리에서 포위당할 때까지 전략과 명분이 없는 전쟁을 지속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히틀러의 본심을 알지 못했다. 독일내에서도 히틀러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다만 히틀러의 나치[1]당의 성장은 끊임없는 경제적 공황에 지친 독일에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할 충분한 동기를 부여했다.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 1934년 수 차례의 암살을 거친 이후 독일의 집권자가 되었다.
히틀러의 부상에 대한 당대 국가들의 반응
독일 외부의 세력들 역시 독일을 빨리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것 이외에는 히틀러의 부상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가 명시적으로 베르사유 시스템에 대한 명백한 저항 의사를 보였음에도 영국은 히틀러가 정말로 체제를 전복할 것이라고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이 이에 관해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역시 상존했다. 영국 역시 재무장이 야기할 국제적 분쟁에 대해서 인지하였으나 재무장 자체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대비를 갖추지 않았다.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대비 여부에 관한 논쟁을 끝낸 것은 히틀러 본인이었다. 그는 군축회담에서 영구적으로 탈퇴하고 국제 연맹에서도 이탈하며 결국은 재무장을 선언한다.
그러나 재무장 선언 이후에도 주변국들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 정치인들은 세력 균형의 붕괴보다 전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독일의 공격적 태도에 대해 곧바로 대응하는 행보를 취할 것을 꺼려했으며,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유럽 열강들이 본인의 저의를 최대한 늦게 알아 차리는 것이 큰 이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적절한 “평화” 발언들을 종종 던져가며 주변 열강들의 안일한 태도를 이용했다. 대표적으로 군축 회담에서 이탈하면서 히틀러가 군사를 300,0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제안한 것은 평화적으로 보이나 기존 베르사유의 100,000명 제한을 무시하겠다는 의사의 완곡한 표현이었다고 헨리 키신저는 평가한다. 이 시점에서 영국은 무장 완화라는 가치를 고수하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이런 방향성에 동화가 되어 있었다. 영국은 특히 이미 구축된 국제 연맹 체계를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키신저의 평가에 따르면 프랑스는 그저 혼자 움직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초기 대응에 대한 평가
키신저는 여기서 당시 히틀러를 저지하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의 관료를 무작정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히틀러의 정책 방향성이 초기부터 뚜렷했던 것은 아닐 뿐더러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 정책으로 인해 얻는 이익이 그의 반항적인 외교정책에서 얻는 손실을 앞선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야망과 잔혹성을 인지할 만한 합리적인 자료가 쌓인 후에는 이미 손 쓰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기에, 당대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정치학적으로 히틀러의 저의에 대한 접근은 근본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강한 독일과 약한 주변국들이라는 정세는 히틀러의 저의와는 관계없이 독일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이 현실주의의 사고관이다.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낸 것이 처칠이었다. 처칠은 영국 의회에 히틀러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건의했고, 또 영국 공군력의 증강을 주장했으나, 영국의회는 처칠의 경고를 단순히 “과장”으로 치부했다. 영국은 비무장 정책을 고수했으며, 평화를 향한 가장 좋은 방법은 대책을 미리 계획하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장의 위협이 없다는 판단하에서 영국은 히틀러에 별다른 대응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스트레사 전선[2]의 형성과 붕괴
프랑스는 독일 동쪽에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독일 동부 프랑스의 동맹국들은 프랑스 공격시에 동쪽 전선을 공격하기에는 너무 약한 국가들이었다. 프랑스의 대외정책은 러시아와의 동맹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굉장히 소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로 키신저는 세 가지를 든다. 1) 소련과 가까운 관계를 맺을 시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을 우려하였고, 2) 프랑스의 동유럽 동맹국들은 소련 군대의 진입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으며, 3) 독일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독일의 선전포고를 유발을 걱정했다. 러시와의 정치적 뿐인 동맹, 그리고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기는 어려운 허상뿐인 영국과의 동맹의 상황에서, 프랑스의 유일한 진지한 동맹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였다.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시, 티롤지방을 뺏길 것을 걱정한 무솔리니는 프랑스와의 군사적 동맹을 채결하여 라인 전선에 군사 투입을 의논하기에 이른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은 이탈리아 스트레사에 모여 독일이 베르사유 체제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일 시 저항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영국이 독일과 얼마 지나지 않아 “해군 합의”를 체결하면서 스트레사의 동맹 전선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자국 안보를 위해서 스트레사의 동맹보다는 적국과의 1대1동맹을 체결하고자 한 것이다.
스트레사 전선은 무솔리니의 아비시니아 공격으로 결정적인 위협에 봉착하게 된다.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와 영국에 큰 딜레마를 안겨주게 된다. 르카르노에서 보장된 라인란드를 수비하는데 있어서 이탈리아의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한다면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맞고, 국제 연맹의 시스템의 역할을 인정한다면 국제 연맹의 일원인 아비시니아[3]를 공격한 무솔리니에게는 제제가 가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영국은 국제 연맹을 통해 이탈리아에 경제 제제를 가하면서 동시에 라발이 무솔리니에게 원유 공급에는 문제가 없도록 하리라는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 외무상 Samuel Hoare는 뒤늦게 Laval과의 협의를 통해 이탈리아에 대한 제제를 풀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협의의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이 협의는 무산이 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점령을 완료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한 두려움에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을 인정하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의 본격적 확장 1: 라인란트 재점령 사태
독일은 에티오피아 사태를 영국의 약화로 인지하고 1937년 3월 7일 라인란트 재점령을 진행했다. 이는 르카르노 조약[4]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이는 도박과도 같았다. 당시의 군사적 능력으로 독일이 프랑스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예상대로 프랑스와 영국은 라인란트[5]에 대해서 공격이나 제제를 감행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입장에서 히틀러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라인란트를 재점령함과 동시에 프랑스에 우호적인 외교 정책을 펼침으로서 프랑스를 안심시켰다. 추가적으로, 프랑스는 르카르노 이후로 영국의 지원 없이 독일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정책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나서지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이 비무장한 동안에는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정책은 철저하게 영국에 대한 심리적인 의존에서 기인한다.
라인란트가 요새화되면서 프랑스가 중앙유럽을 보호하는 것은 어려워졌고, 반대로 히틀러의 중앙유럽을 향한 길은 완전히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미온적인 태도에 탄력을 받은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세력을 지지함으로써 무솔리니[6]와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은 리슐리외가 300년전 처했던 상황과 흡사하게 되었는데, 그때와는 다르게 프랑스는 결단력 있는 행동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영국 역시 스페인 내전을 기점으로 기존의 세력 유지자로서의 역할 수행에 있어서 실패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 이후에 이어질 체코슬로바키아의 점령을 내다보았지만, 전쟁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독일의 본격적 확장2: 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비로소 히틀러는 베르사유의 국경을 넘을 군사력이 갖추어 졌음을 느꼈다. 3월에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감행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과정에서 어떠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지도 받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 시민들에게는 오히려 환영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게르만인이 분포한 지역을 통일한 후에는 멈춰주기를 바랄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예측이 옳은지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다. 체코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수 많은 계승국 중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해 있었으며 독일 민족뿐 아니라 수 많은 민족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였다.
독일의 본격적 확장3: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와 전쟁의 서막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체코 내부의 독일인들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처음에는 주데텐렌드에 독일인 거주지를 분리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 후에는 주데텐렌드 합병을 주장하였다. 프랑스는 즉각 체코슬로바키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으나,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의 확장 정책을 마주하게 된 영국의 지도층은 유화 정책을 전개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야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대규모의 전쟁을 방지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미국 역시 중립적인 태도를 밝히며 개입하기를 꺼려하였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조짐이 보이자,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층은 1938년 9월 뮌헨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협상을 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의 수상 네빌 채임벌린은 확장 정책의 중단을 조건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대부분을 독일에 양도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도출하였다. 뮌헨 협정에 대해, 협정 체결 초기 서양 세력의 지도층은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1939년 3월, 히틀러는 본색을 드러내고 협정을 파기함과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전역을 점령하였다. 영국의 지도층은 유화 정책으로 히틀러를 저지할 수 없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프랑스와 함께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나의 의견>
제1차 세계 대전은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기준으로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대규모 전쟁에서 참패한지 불과 20년도 안되어 더 큰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유일하다. 헨리 키신저가 히틀러의 부상에 관하여 다룬 대서술에서 보여지는 두 가지 핵심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대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의 안일한 외교정책, 둘째는 히틀러라는 개인의 역량이다. 이 챕터에서는 첫 번째 이유를 훨씬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키신저는 당대 강대국들의 외교 정책에 관한 평가에서 무작정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당시로서는 독일의 의도에 대한 예측이 어려웠을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의견에 대해 반대한다. 당대 강대국들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세계는 역사가 여태껏 보지 못한 가장 암담한 비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우리는 히틀러의 2차 세계 대전과 유사한 사건을 동양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충분히 임진왜란과 같은 참상을 방지할 수 있었다. 당시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대신들의 진술은 히데요시의 침공을 예측하기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는 십만군 양병설을 주장하며 일본에 방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어떠한 대비도 추가적으로 하지 않았고 결국 임금이 의주까지 도망치는 굴욕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이 사건은 적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확장과 유사점을 가진다.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 정책가들이 히틀러가 베르샤유 시스템을 파괴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과 유사하게 조선의 조정도 히데요시의 군대가 조선 침공을 목적으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안일한 생각이 재앙을 불러일으켰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의 입장에서 주변국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난점은 인류 사회에 정치의 개념이 등장하고 국경이 나누어진 이래로 달라진 적이 없다. 그렇기에 현실주의 정치이론에서는 상대국의 군사 증강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을 때에, 어쩔 수 없이 안보를 위해 자국의 군사력도 증강하는 것이 현명한 국가의 대처라고 주장한다.
다만, 조선의 사례에 비해 유럽의 두 국가는 더욱 안일하고 무지한 정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200년간의 평화 이후 군사적으로 약소했던 반면 프랑스와 영국은 본래 강대국이었으며 전쟁 직후 전쟁에 대한 경각심이 최고조로 달해 있는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군사적 확장을 저지하는 것은 조선이 일본의 히데요시의 군사력을 저지하는 것에 비해서 훨씬 간단한 일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의 안일한 대처는 조선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선조에 비해서도 무능한 대처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나는 “독일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피상적인 변명에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안일한 대처의 보다 핵심적인 원인은 마냥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런 두려움으로 인한 회피가 더 큰 전쟁을 부를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평화”적인 이상주의 정책의 일환인 집단 안보와 국제 연맹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의 힘을 과신했다.
그렇다면 베르사유 조약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정당한 조약이었는가? 국제 연맹은 에티오피아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저 역사 속 실패로 남을 무능한 단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베르사유 조약 자체는 보다 더 심층된 평가를 요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이 18세기 이후 체결된 조약 중 최악의 조약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우선 베르사유 조약은 지대한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은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로 명시하며 그 도덕적인 근거로 민족 자결주의와 인간 존엄성을 든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에 대해서는 그 자결권도 존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히틀러 부상의 시작이 게르만 우월주의라는 왜곡된 민족주의의 표출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독일에 대한 모순적인 정책이 낳은 결과가 실로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정책의 원인은 프랑스가 제공하였다. 프랑스는 전쟁 피해 복구나 경제적인 이권 이상의 것을 베르사유로부터 얻고자 했다. 다른 말로,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실리를 챙기고자 하는 이른바 “국가 이성”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다. 베르사유에서 프랑스의 가장 지대한 그리고 유일한 목적은 바로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보복이었다. 역사적으로 패전국에 대한 보복은 관례적인 일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승전국의 힘이 온전할 때 가능한 일이다.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마가 카르타고를 부수고 땅에 소금을 뿌려 지도에서 삭제시킨 일은 명백한 심리적 보복이었으나, 로마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와는 다르게 보복에 대한 재보복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로마는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강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명백히 힘을 잃어가는 추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모한 보복적 정책은 독일인들을 궁지로 밀어 넣었고 결국 히틀러와 같은 인물의 부상에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압도적인 능력으로 독일의 부상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프랑스의 보복적 정책은 대책이 없는 무모한 정책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보복성을 완전히 상반되는 가치인 이상주의적 평화로 포장하였다. 이 점이 베르사유를 단순히 실패한 조약이 아닌 “최악”의 조약으로 만든다. 이 포장지가 언젠가 찢어져 실체를 드러내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베르사유 조약을 만들고 히틀러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 관료들은 분명히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에 있어서 무거운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참사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은 분명히 히틀러라는 개인에 있다. 그렇기에, 히틀러라는 리더상을 분석하는 과정은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히틀러는 선동가였다. 그러나 히틀러라는 선동가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더 큰 이유는 당시 독일인들의 요구를 꿰뚫어본 그의 통찰력이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독일 민중이 아닌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7]의 대중은 1차 세계 대전에 있어서 황제국 독일[8]의 책임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베르사유로 인한 과도한 제제에 고통받는 동시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역사적 라이벌 프랑스에 패배했다는 사실은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패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독일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독일인들의 불만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민족적 굴욕으로 정리할 수 있다. 히틀러의 선동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정책이 이 두 가지 불만의 핵심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신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이 불가피했으며, 군사력을 갖추어 군수산업을 가동해야 했다. 또한 프랑스에 지급하는 막대한 배상금은 독일의 빈곤을 가중시켰다. 이런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은 군사적 팽창과 전쟁이었음을 히틀러는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독일 민중에 납득시켰다. 히틀러는 추가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여 독일 민족에 우월감을 안겨주며 안심시켰다. 참고로, 히틀러의 아리아인 기원설에서 기반한 게르만 우월주의는 어떠한 역사적 혈통적 기반이 없다. 아리아인은 인도-유럽 어족에서 기인한 한편, 게르만족은 인도-유럽 어족과 어떠한 관련도 없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군사적 정책들은 대단히 현명했다고 평가한다. 민중의 지지를 얻은 순간부터 히틀러는 과감한 군사적 정책을 취하였다. 인상 깊은 점은 라인란트 점령을 신속하게 감행했다는 점이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동부와 서부 전선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부 전선을 정리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서부 전선에 위치한 라인란트를 재점령하는 일이었다. 서부 전선의 라인란트를 군사적 요새로 만듦으로서 서유럽 진출의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묶어 놓음으로서 독일 동방의 프랑스의 작은 동맹국들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동부 전선을 위협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군사적 상황을 간파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도 히틀러가 유능한 축에 속했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한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통찰력과 설득력을 모두 갖춘 히틀러와 같은 리더는 국가적 난세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히틀러의 출현이 아니었다면 독일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베르사유의 잔혹한 배상금[9]에 영원토록 시달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히틀러가 국가적 난세라 하더라도 필수적인 리더상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히틀러의 통찰력과 결단력으로 독일이 재무장하여 폐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치 히틀러의 종말은 결국 더 큰 전쟁에서의 참패이다. 그 후 독일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냉전 체제하 세력 균형의 일환으로 미국이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결국 히틀러의 부상과 전쟁의 발발을 포괄하는 역사를 볼 때, 독일의 복구는 히틀러의 업적이 아니라 소련의 대두와 냉전으로 발생한 “운”이었다. 고로, 제1차세계대전 전후 복구의 공을 히틀러의 것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역사의 우연에서 기인한 결과일 뿐이다.
[1] 독일 노동자 당이 1920년에 개칭한 이름으로, 지지 기반은 기존 정당 · 노조에 불만을 품은 중간층과 실업자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낀 경영자 단체의 원조를 받아 풍부한 자금으로 선전 활동을 시작하면서 선거를 통한 정권의 쟁취를 꾀하였다. 1932년에 제1당이 되고, 1933년에 재계와 군부의 지지 아래 히틀러 정권을 실현하였다.
[2] 스트레사는 이탈리아의 소도시로 스트레사 전선이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부상하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든 방어 전선이다.
[3] 에티오피아의 전신
[4] 르카르노 혹은 로카르노 조약은 로카르노 조약(The Locarno Pact)은 1925년 10월 16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대표가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체결한 일련의 국지적 안전보장조약이다. 그 핵심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점령 방지였다.
[5]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시행되고 르카르노 조약에 의해서 강화된 방침에 따라 독일 영토임에도 비무장 지대로 강요되었던 곳으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서유럽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6] 이탈리아의 정치가·파시스트당 당수·총리(재임 1922∼1943). A.히틀러와 함께 파시즘적 독재자의 대표적 인물. 1939년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 나치스 독일·일본과 함께 국제파시즘 진영을 구성하였다.
[7]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부터1933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키던 비공식적 지명이다. 바이마르라는 이름은 이 공화국의 헌법 제정단이 처음으로 회의를 개최한 바이마르란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 정식 명칭은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이름을 따온 독일국
[8]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은 자연스럽게 황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9] 베르사유의 배상금은 독일의 전쟁 전 GDP를 기준으로도 과하게 무리한 액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