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밀봉 열차에 오르지 못했다면?

역사학 2021년 07월 07일

러시아 혁명은 20세기를 넘어 지금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혁명은 이후 일어난 수많은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을 통해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은 20세기를 지배한 냉전의 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 냉전에서 비롯된 갈등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분쟁의 근원이 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역사, 사회, 정치, 경제, 철학에서 가지는 의의는 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그 영향력 때문인지 러시아 혁명은 학술적으로 활발하게 연구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체 역사물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역동성은 그 자체로 사가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다. 1917년의 2월 혁명, 그리고 뒤이어 발생한 10월 혁명은 제정에 대한 인민들의 축적된 불만과 이들을 잘 인도한 사회주의, 그리고 인민주의 운동가들의 힘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우연적 사건들과 레닌이라는 개인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다. 특히 레닌의 영향력은 10월 혁명의 방향성과 소비에트 연방의 형성을 결정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인텔리겐치아들과 멘셰비키들이 주도한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실각하자,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은 귀국을 추진한다. 여러 방안 중 실현된 것은 독일의 지원으로 철도와 배편을 통해 러시아로 귀국하는 이른바 “밀봉 열차” 계획이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이 예상보다 오래가면서 부담이 커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내부에서 혼란을 가중하고 친 독일적 정권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에 레닌이 적임자로 선정됐다. 독일은 레닌을 위시한 볼셰비키 세력의 저항이 결실을 보면 레닌의 귀국을 도운 독일과 새로운 볼셰비키 세력 간의 강화가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이에 독일은 러시아에 잡혀있는 독일 포로들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레닌을 귀국시킨다는 내용의 협정을 러시아와 체결했다. 1917년 3월, 레닌은 열차와 페리를 타고 30여 명의 동료와 함께 러시아 땅을 밟았다.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레닌은 러시아 민중들과 볼셰비키 당원들을 상대로 자신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프롤레타리아의 무장봉기 사상을 설파했다. 그의 과격한 생각은 금세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는 끊임없이 연설하고 다녔고, [프라우다]에 계속해서 글을 발표했다. 당내에서도 소수파에 속하던 그는 조금씩 세를 늘려가 [4월 테제]를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 내걸기에 이른다.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에 반대하며 7월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자신들을 대표해 주기를 바랐지만,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한 레닌은 결정적인 순간에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임시정부는 레닌의 체포령을 발표했지만, 레닌은 간발의 차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핀란드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볼셰비키 당원들이 민중들을 2차 혁명으로 이끌 것을 지시하던 레닌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기회를 잡는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충돌하면서 연합 내각이 휘청하는 사이,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를 공고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 인민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문제가 되고 있던 경제 침체를 임시정부의 탓으로 돌렸다. 케렌스키가 러시아 공화국의 정식 출범을 선언하며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레닌의 직접적인 지시 아래 10월 혁명이 진행됐고, 혁명의 성공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긴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고 중요한 장면인 만큼, 혁명과 혁명가를 둘러싼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고, 계속해서 더 많은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그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레닌이 혁명을 향해 착실히 나아갔다는 느낌보다는 그의 계획이 엎어지고 흔들릴만한 상황이 계속되었는데도, 특유의 실행력과 예상치 못한 행운이 겹쳐서 마치 영화같이 혁명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행운 중에서 첫 번째는 1917년 3월 그의 귀국에 대한 협상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타결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귀국이 좌절되었다면, 또는 늦어졌다면, 러시아 혁명의, 나아가 러시아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정치, 경제학적 상황과 러시아 민중들의 시민 의식의 변화를 살펴보고, 다르게 전개되었을 역사의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정치적 상황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권력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 공백을 메꾼 것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였다. 1917년 3월 2일 오전 소비에트 세력은 이스폴콤을 출범시켰고, 그 주도권은 멘셰비키가 잡았다. 같은 날 저녁, 두마는 임시 각료 회의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임시정부로 불리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임시정부가 러시아의 공식적인 권력 기관으로 인정받았지만, 실질적인 힘은 소비에트에 있었다. 임시정부가 의결 사항을 소비에트에 보고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멘셰비키였던 사회민주당원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소비에트]는 임정이 ‘통치한다’는 허구를 창조하고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각종의 다양한 ‘행정’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비에트는 금세 세부 행정 조직들을 결성해 “그림자 정부”로써 활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스폴콤 안에 “접촉위원회”를 만들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를 연결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했다. 하지만 정책과 행정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자는 임시정부의 제안은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의 무력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레닌의 귀국이다. 레닌의 귀국은 독일과 러시아 임시정부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이 합의에서 임시정부가 이득을 볼 부분은 전혀 없었다. 레닌이 가진 급진주의적인 성향은 여러 정보통을 통해 임시정부도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레닌의 귀국을 승인해 주었다. 레닌뿐만 아니라 트로츠키 등 많은 과격한 볼셰비키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귀국했다. 많은 경우 임시정부가 그 비용까지 부담했고, 그 과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이를 해결해 주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과격파 소비에트, 특히 볼셰비키의 득세를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저널리스트 조지 페이퍼는 계간지 MHQ에 기고한 칼럼 [공산주의 혁명은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이렇게 된 것은 러시아의 민주적 정치가들이 느끼는 무력감도 한 가지 원인이었다. 그들은 예전의 비민주적 정부에 대한 반동 작용으로 종종 그런 무기력에 휩싸였다. 다시 말해 그런 전제 정부에 대한 반동 작용이 지나친 허용 정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새로운 관리들은 여행과 언론의 자유에 제동을 건다면 예전의 정부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했다.

멘셰비키 계열의 소비에트가 실권을 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그 어떤 위원회에서도 다수파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 볼셰비키 인사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파였던 멘셰비키와 타협하는 노선을 택하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통제하던 신문인 [프라우다]마저도 레닌의 주장을 대놓고 비난했을 정도이다. 이런 상황을 바꿔 놓은 것은 레닌 개인의 역량이었다. 레닌의 급진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볼셰비키 안에서도 의견이 통합되지 못했다. [4월 테제]를 처음 발표했을 때도 그랬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볼셰비키]의 중심적 기관들은 그것[4월 테제]을 ... 적의를 갖고 맞았다. 아무도, 어느 조직이나, 어느 그룹이나, 어느 개인도 거기에 자신의 서명을 첨부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레닌의 직접적이며 일상적인 영향 아래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온, 그리고 해외로부터 레닌과 함께 귀국한 지노비에프조차 침묵을 지키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

하지만 레닌은 끈질기게 자신의 견해를 밀어붙였고, 결국 볼셰비키는 이 테제를 당의 공식 입장으로 수용했다.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볼셰비키는 점점 레닌의 사상에 동화되어 갔다. 볼셰비키 안에는 레닌의 세력을 누를 만한 인사가 없었고, 소비에트의 멘셰비키와 임시정부 측에서는 레닌의 위험성을 낮게 봤다. 하지만 이는 레닌이 볼셰비키를 바탕으로 자신의 세를 늘리는 것을 방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임시정부와 끝까지 공식적인 협치를 할 것을 거부하던 소비에트는 4월 위기를 거치면서 임시정부와 연합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연합 정부는 볼셰비키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에서 7월 위기가 발생했고, 이번에는 볼셰비키와 레닌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연합 정부는 레닌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지만, 레닌은 가까스로 도망쳐 핀란드에 망명했다.

일단 4월과 7월의 소요를 잘 잠재우고 레닌의 정치적 공세를 일차적으로 잘 막아낸 임시정부와 연합 정부였지만, 이 시기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제대로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표적으로 전쟁의 문제가 있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병사들과 일반 국민은 전쟁에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대에서는 탈영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밀류코프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전쟁을 계속할 것을 바랐다. 특히 미국이 참전하면서 연합국의 승전 가능성이 커지자, 그 믿음은 더욱 커졌다. 전쟁을 강행하는 지도부와 이에 반대하는 국민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으며 긴장 상태가 유지되었다. 두 번째는 토지의 문제였다. 대부분 농민은 토지를 국가가 모두 몰수하고 무상으로 재분배하는 형태의 토지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의 권력 기관이었던 임시정부는 농민들의 이런 요구사항을 제대로 반영해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 소비에트도 노동자 중심의 기관이었지, 농민들을 위한 기관은 아니었다. 토지 문제가 시사하는 점은 러시아 인구의 80%에 달하는 농민들의 뜻을 대변해 줄 권력 기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는 이런 문제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국민의 지지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제적 상황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러시아 경제는 발전을 거듭하며 서유럽의 경제 대국들에 대항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의 엄청난 성장은 20세기 초의 호경기의 근간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와서는 오랫동안 농노제와 공동경작으로 낮은 생산성을 보여주던 농업 부문에는 드디어 유의미한 시장 지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마, 사탕수수, 축산 제품 등 상품용 생산물의 전문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19세기 말의 젬스트보 통계는 농민들의 재산 분화가 이전과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우크라이나나 핀란드 등에서는 새로운 대지주 층이 발생해 대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1861년에서 1899년까지 농촌의 남성 인구가 2,400만에서 4,400만까지 늘어나 인당 할당된 토지가 매우 감소했는데, 이는 토지의 구속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해서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는 [러시아 경제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제 지주들은 예전처럼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경작지에서 작업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었다. 부유한 농민들은 1861년 이후에 발생한 구 지주에 대한 의무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신들의 분여지를 좀더 빨리 매입하려고 노력했다. ‘탈농화된’ 농민들은 분여지에 대한 대가로 구 지주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부역노동을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잘것없는 토지가 그들을 농촌에 머물도록 붙잡지 못했고, 아무런 예속도 받지 않으면서 좀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도시로 떠나거나 견고한 부농 경영에 고용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지주들은 영지를 수익성 있게 변모시키기 위해 새로운 기계, 종자, 비료, 기술을 도입해야 했고, 이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 대한 꾸준한 수요로 작용했다. 토지의 예속에서 벗어나 노동자가 된 농민들은 점차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20세기 초의 다양한 사회적 소요로 연결된다.

같은 시기에 도시에서는 러시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1880년에 이르러서는 공장제 수공업에서 공장제 생산으로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졌고, 산업혁명이 완료되었다. 특히 석탄, 석유 채굴과 석유정제, 기계공업, 화학산업이 빠르게 발전했다. 이 시기의 통계를 살펴보면, 1860년에서 1895년 사이 주철 정련은 4.5배, 석탄채굴은 30배 증가했고, 석유 채굴은 1870년에서 1890년 사이 140배 증가했다. 이 분야에서 러시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생산량을 끌어올렸다. 농업 공동체에서 독립해 가족들과 도시로 영구적으로 이주한 자유인들 또한 지속해서 증가해 도시가 빠른 속도로 커졌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자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의 수혜를 입은 세대이기도 했고, 복잡한 기계를 돌리기 위해 추가적인 지속해서 받은 영향도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본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인프라도 단단하게 구축되었다. 산업화의 완성으로 증기기관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뛰어난 동력을 갖추었다. 도시에는 다층 주택과 전차가 출현했고,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철도와 수운도 크게 발전했다. 1865년에서 1899년 사이 러시아 전역의 철도 길이는 40배 증가했다. 특히 모스크바 등 국가의 중심적인 지역과 대규모 곡창지역, 주요 항구들이 철도로 연결되며 농촌의 시장경제 편입을 가속했다. 수운의 발전도 고무적이었다. 1860년에 400여 척에 그쳤던 하천기선은 1890년에 1,500여 척 수준으로 증가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함대의 힘이 미약해 외국 선박을 이용해 무역해야 했던 반면, 19세기 말에는 하선의 수를 50척에서 520척으로 증가시키면서 자국 선박을 통해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에는 각각 1892년에서 1903년,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러시아의 내무장관을 지낸 비테와 스톨리핀의 실용적인 개혁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비테는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장 경제의 발전을 촉진했고, 스톨리핀은 농민토지은행을 중심으로 한 농업개혁을 성공적으로 이행하며 20세기 초 러시아 경제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경제는 노동자들의 봉기와 혁명의 움직임, 제정의 약화로 침체기에 빠지나 했지만, 이는 기우였다. 경제의 주기적 발전은 독과점을 심화시켰다. 금속, 철도, 기관차, 석탄채굴, 석유가공 등의 중공업 분야에서 거대 독점체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러시아 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며 여러 지표에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뒤를 곧바로 잇는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높은 경쟁 속에서 러시아 기업들은 혁신과 재건을 거듭했고, 새로운 기업과 산업이 생겼으며, 생산의 기계화가 가속화되었다. 특히 투자재의 생산이 빨라져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공업 설비의 대부분을 국내에서 조달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러시아의 경제적 도약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는 [러시아 경제사]에서 이 시기의 성장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관측을 제시했다.

이러한 발전속도가 계속 유지된다면 러시아는 20세기중반에 군사, 금육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대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며, 1985년 무렵에 국가의 인구는 러시아인 2억 6,000만 명을 포함해서 4억에 이를 것이라는 통계적 예측도 나왔다.

시민 의식의 성장

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이야기할 때 항상 후진성에 초점을 두며 러시아를 무시해 왔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이후 러시아는 크게 변했다. 니콜라이 2세의 통치 시기에 교육에 대한 지출은 6배 이상 증가했고, 1908년 초등 의무교육 제정법이 통과되면서 농촌과 도시 모든 곳에서 초등교육이 보편화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등 교육과 대학 교육도 많이 늘어났다. 니콜라이 2세 치하에서는 70% 이상의 대학생이 학비를 전혀 내지 않고 초등교육부터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대학생의 37%가 여학생이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표였다.

실제로 당시 여성들은 사회에서도 성별에 따른 제약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레닌이 처음 아내를 마주친 곳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사회주의 모임에서였다. 후일에 레닌의 아내가 되는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여자 대학교까지 나와서 노동자들에게 글과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육자였다. 이처럼 러시아의 여성들은 큰 제약 없이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며,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혁명 시기에 인텔리겐치아들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떠오른 사회주의 운동가들 또한 이런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등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러시아의 중심지에서는 굉장히 먼 지역에서 태어났고 그리 높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레닌은 카잔 대학 재학 시절 제정 타도 운동에 가담한 죄목으로 1년간 제적생으로 먼 친척 집에서 지내야 했는데, 이 시기에마저도 우편으로 카잔의 도서관에서 법학, 정치학, 경제학 서적을 빌려 공부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국민 누구든 원하면 큰 제약 없이 대학 전공 수준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러시아에서 지식수준에 비례해 시민 의식의 크게 성장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텔리겐치아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쉽게 민중들에게 퍼질 수 있었다.

러시아 국민의 시민 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단일한 사건이 1917년 11월 치러진 총선이다. 물론 제헌 의회를 뽑는 이 선거가 러시아에서 처음 치러진 민주적 선거는 아니었다. 제정 치하에서 두마를 구성하는 선거가 제한적으로 실시된 적도 있었고, 임시정부 시절에도 제한적으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1917년 11월의 총선은 그 어떤 선거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10월에 볼셰비키의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치러지는 선거였다. 사실 10월 혁명 자체가 러시아 인민의 뜻을 제대로 국정에 반영하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자유주의자와 온건파 사회주의자에 반발해 볼셰비키가 주도한 사건인 만큼,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을 정당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볼셰비키는 국민의 뜻에 따라 임시정부가 약속한 의회 수립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다. 11월 12일에 치러진 선거는 당시의 상식을 적용해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20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당시로써는 생소한 보통선거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투표 결과 인텔리겐치아들의 사회혁명당이 40.4% 득표로 선전하고 볼셰비키는 24%를 얻는 데 그쳤을 때, 볼셰비키는 그 결과에 따라 제헌 의회를 소집했다. 물론 볼셰비키는 금방 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처음 실행하는 전국적 보통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는 그만큼 러시아의 시민 의식이 현대적인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는 증거이다.

10월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볼셰비키 내에서도 소수파였던 과격분자들이 권력을 쥐고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레닌의 힘이 컸다. 레닌이 제때 러시아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혁명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볼셰비키 안의 소수 과격파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였을 것이다. 10월 혁명 당시 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이들, 대표적으로 트로츠키,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은 모두 레닌 없이는 혁명을 수행할 자질이 부족했다. 스탈린은 애초에 레닌의 이상주의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레닌이 열차를 타고 귀국할 때 볼셰비키에서 파견한 환영단에 스탈린은 불참했을 정도니, 레닌과의 사상적 괴리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프라우다]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시키는 일을 완수해내는 데는 능력을 보였지만, 앞에 나서서 민중을 휘어잡을 힘은 부족했다. 트로츠키도 조직력이나 글을 써내는 능력은 특출했지만, 레닌의 과격한 사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트로츠키도 본래 타협파 볼셰비키와 비슷하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인물 다 레닌의 실행력과 혁명을 향해 달려가는 정열적인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 레닌은 사람들에게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설파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 누구에게라도 혁명에 필요한 세부적인 지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추진력 없이는 10월의 혁명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서 얘기했지만, 레닌의 사상은 당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오랜 망명 생활 동안 러시아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과 멀어져 이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과격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러시아에서 그가 추구한 목표는 2월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와 임시정부의 정책들을 뒤엎고 2차 혁명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2월 혁명을 완전한 혁명으로 가는 전초적인 성격의 혁명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러시아 시민들은 2월 혁명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뜻을 대변하지 못하는 제정에 대한 반대로 혁명을 일으킨 것이지, 마르크스가 얘기한 부르주아 혁명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레닌은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노동자 국가 건설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무장봉기를 주장한 것이다. 당시 레닌 말고 러시아에서 이런 주장을 할 사람은 없었다. 레닌의 사상은 혁명에 적합한 것이었고, 레닌과 함께 러시아 국내로 유입된 이들은 10월 혁명을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레닌 없이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본다.

임시정부의 통치가 계속되면서 러시아 공화국이 자리를 잡는다

10월 혁명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러시아를 통치해 나갔을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에서 공화정이 수립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러시아 공화국의 장래는 상당히 밝았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예측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임시정부의 전쟁 속개 결정이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에 끝이 났다. 만약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하지 않고 동부전선에서 계속해서 독일군을 묶어주었다면, 종전이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때까지 버텼다면 러시아는 승전국이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나 중앙아시아에서의 이권, 그리고 폴란드 등의 유럽 중심부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영토를 보장받았을 수 있다. 이는 팽창하는 러시아의 산업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레닌은 반전 어젠다를 바탕으로 권력을 잡기도 했고, 독일의 지원을 받아 귀국했기 때문에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계속 권력을 잡았다면 전쟁에 대해 더 강경한 노선을 유지했을 것이다. 10월 혁명 직후에 실행된 총선에서 40.4%를 득표한 사회혁명당도 당시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임시정부는 전쟁 중에 민심의 이반을 감수하더라도 종전 이후에 강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임시정부의 통치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할 여력이 확보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를 비롯해 임시정부의 중심이 된 세력은 소위 부르주아 계층 출신이었다. 따라서 집권 초기에는 대부분 농민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민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계기는 1918년 1월에 소집된 제헌 의회에 있었다. 이때 전체 767석 중에서 347석을 차지한 사회혁명당은 소위 인텔리겐치아 계층이라 불리는 이들이 중심이 된 정당이었다. 인텔리겐치아들은 18세기 말부터 농민들과 긴밀하게 움직였다. 라디스체프 등의 인물들은 농노제 폐지에 대한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회혁명당의 선전은 임시정부에게는 호재였다. 제헌 의회가 민심을 모으는 기구로써 기능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헌 의회와 임시정부가 협력해 국정을 운영했다면, 임시정부 초기의 미숙한 운영은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에 승전국의 지위를 가져오고, 민심을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임시정부가 충분히 멘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 세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거나 이들을 흡수해 권력을 공고히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인다.

마지막은 러시아가 보여주고 있었던 경제적 성장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러시아의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러시아 국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들[미국과 러시아]의 출발점은 다르고 발전 경로도 상이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섭리의 어떤 비밀스러운 요구에 의해 언젠가 자신의 수중에 이 세계 절반의 운명을 각각 장악하게 될 사명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됐고, 농촌에 남아있던 엄청난 노동력을 활용해 공업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빠르게 확보했다. 레닌의 독재 없이 이런 발전이 계속되었다면, 서유럽의 경제 대국들에 대적할만한 경쟁력을 갖춰 토크빌의 예언을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실현했을 수 있다. 임시정부가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잘 제시하고 국제 시장에서 러시아의 생산물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면 임시정부는 발전하는 경제와 함께 안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러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공식 정부가 들어섰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를 위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온건하고 생산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지 몰라도, 공통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훗날 2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레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이 혁명[2월 혁명]의 발전은 곧 2월 혁명의 결실인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2월 혁명으로 오랜 시간 러시아 인민들을 구속하던 제정은 무너졌고, 러시아 인민들은 드디어 민주주의의 맛을 보았다. 특히 제헌 의회의 소집 과정과 구성은 공화국으로서 러시아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러시아 인민들은 그들은 러시아에서 새로운 정치체제가 잘 정착하게 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 레닌이 불러온 혁명의 불씨는 민주적인 러시아 공화국 수립의 가능성을 가능성에 머물게 했다. 레닌이 밀봉 열차에 오르지 않았다면 10월 혁명, 소련, 냉전 대신 유럽을 넘어 전세계를 호령하는 러시아 공화국의 탄생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김성동

하나고등학교 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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