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향한 3가지 접근: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의 전후 시대 구상

정치학 2020년 07월 07일

끔찍했던 전쟁의 전환점

1939년 9월 1일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1941년 독일이 군사적으로 소련과 공산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후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소련군과 추축군  간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히틀러는 6군단 전체를 잃게 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소련의 독일군과 대등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처칠 , 루즈벨트 , 스탈린  등의 연합국 지도자들은 이제 승리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베르사유 조약의 실수를 피하기를 희망했으나 각자 다른 배경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상했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참석한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의 전후 시대(post-war)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각자 자기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이야기했다. 처칠은 유럽의 전통적인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재건하기를 원했다. 이는 영국, 프랑스, 심지어 패배했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미국과 함께 이 나라들이 소련과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 루즈벨트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과 함께 세 명의 승자가 세계의 이사회로 활동하는 전후 질서를 구상했는데, 이 체제는 "Four Policemen"으로 잘 알려진 계획이다. 스탈린은 그의 공산주의 이념과 전통적인 러시아 외교 정책을 모두 반영했다. 그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중앙 유럽으로 확장함으로써 승리를 청산하려 했고 소련군에 의해 정복된 나라들을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Buffer Zone)로 만들 작정이었다.

처칠의 전후 시대(post-war)계획

1940년 6월 프랑스가 무너진 이후, 영국은 혼자서 히틀러에 대항해서 싸웠고 그들은 전후의 목표에 대해서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도 불확실했고 순전히 전쟁에 온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영국은 결국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했고 193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다. 추축국이 미국과 소련을 건드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미국과 소련이 참전하면서 전쟁의 기세는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쯤부터 처칠은 현실적으로 전쟁의 목표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처칠은 러시아와 맞설 수 있는 전통적인 세력균형(BOP) 시스템이 프랑스와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재건되기를 원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 만약 미국이 군사를 철회한다면 소련이 대륙의 지배적인 국가로 부상할 것은 자명했다. 당시 미군이 철수하는 순간 소련이 유럽의 중심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과 영국이 역사적으로 차지했던 주도적인 위치가 미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처칠은 명확한 판단을 내려야했다. 즉,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응해야하는 상황과 미군 없이도 평화가 유지된다는 이상주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균형에 바탕을 둔 평화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비교적으로 약한 위치였지만 영국의 오래된 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도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더 이상 힘의 균형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처칠에게는 영국이 전후 상황을 혼자 맞지 않기 위한 것, 즉 연합국과의 외교보다 미국과 두터운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소련의 팽창을 두려워한 처칠은 미국을 전쟁 이후 소련의 권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에, 미국은 영국의 힘을 과대평가했고 영국이 혼자서도 유럽의 균형을 유지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나갈 때 쯤, 처칠은 아이젠하워로 하여금 소련보다 먼저 베를린, 프라하, 그리고 비엔나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는 헛된 전략이라고 비춰질 수 있으나 처칠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유는 발칸의 취약성 때문에도,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전후의 소련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 처칠은 프랑스를 강대국 지위로 회복시키고 독일에게 가는 피해를 최소화하여 소련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소련의 과도한 배상요구와 팽창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두터운 동맹은 미국이 유럽에서 손을 떼면서 쓸모가 없어졌고 많은 동유럽 국가들은 결국 소련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된다. 미국이 유럽에서 손을 떼는 과정은 루즈벨트의 계획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1874~1965)

루즈벨트의 전후 시대 계획

1942년 봄, 소비에트 연방의 장관 몰로토브가 워싱턴에 방문했을 때 루즈벨트는 그의 전후시대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루즈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수립된 국제연맹과 제도의 실패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윌슨의 이상주의가 말했던 집단 안보체제와 유사한 "Four Policemen"을 구축하기를 희망했다. "Four Policemen"은 미국, 영국, 러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처칠이 말했던 균형을 통한 평화(Equilibrium - 이상주의와 BOP의 혼합체)와는 달리 '조화(Harmony)'를 통한 평화에 바탕을 둔다. 영국은 서유럽과 대영제국, 중국은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소비에트 연방은 동유럽과 중앙유라시아, 그리고 미국은 서반구를 담당하며 Four policemen을 제외한 국가들에 비해 나머지 국가들은 무장이 금지된다. "Four Policemen"은 대외적으로 어느 한 나라가 강성해져서 세력 균형을 깨는 일이 없도록 상호 견제하는 메테르니히 체제 와 상당히 유사하다. 루즈벨트가 그렸던 "Four Policemen" 컨셉은 실행될 수 없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승전국들 간의 엄청난 이념적 격차로 인해 전쟁에서 힘의 균형을 일어나지 않았고 둘째,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스탈린이 동맹국들과의 대척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이념을 따랐기 때문이다. 루즈벨트에게는 만약 policemen 중 한 명(소비에트 연방)이 역할을 다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의 대책이 없었다. 결국 전통적 균형은 버려졌고 새로운 세력균형을 만들기에 매우 곤란해진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미국은 유럽의 재건에서 손을 떼었는데, 1944년 2월 29일 루즈벨트가 처칠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루즈벨트는 대서양 헌장 (Atlantic Charter)을 통해서 전세계의 자결권을 지지하였다. 그는 처칠과 함께 헌장을 선언하며 루즈벨트는 이것이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했다. 즉,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종식시키고 전쟁이 끝나는 동시에 식민지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식민지를 향한 루즈벨트의 관점은 선견지명이었다. 그는 미국이 피할 수 없는 식민지 자유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기를 원했고 이 자결권이 인종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이는 그들이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위험한 잠재적 적들을 없애는데 큰 역할을 했ㄷ. 루즈벨트는 소련과 함께 제2차세계대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독일군과 일본군에게 맞서면서 부족한 군사력을 채우는 등 미국은 전쟁의 많은 부분에서 소련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또한 얄타회담에서 처칠보다 스탈린에게 더 친근하게 대하고 소련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한 이유가 바로 국내사정이 대영제국에 비해서 혼란한 소련과 세력균형을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1882~1945)

스탈린의 전후시대 계획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을 확장시켜 동유럽의 자본주의 진영에 맞설 수 있는 지대를 건설하기위한 기회로 전쟁을 이용했다. 이를 Security belt, 혹은 완충지대(buffer zone)이라고 한다. 스탈린은 현실정치(Realpolitik)를 추구했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으며 오직 이익에 따라서 행동했다. 구체적으로 스탈린은 제2차세계대전 중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폴란드와의 커즌선 (Curzon Line)을 전쟁 발발 직전보다 약 250KM 서쪽으로 옮겼고 발트 3국 을 소련의 세력권 밑에 두었다. 이는 대서양헌장에서 선언된 자결원칙에 명백히 위배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은 대영제국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퉤이, 덴마크에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어떤 요구도 지지할 것을 이야기 했다.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국가 사이의 어떠한 차별도 주지 않았지만 민주주의가 덜 무자비하고 덜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화에 접근할 때 세기의 러시아 정치가들과 동일한 소비에트 연방의 광활한 주변부에 가능한 한 넓은 Security belt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처칠과 끊임없는 대립구도를 유지했으나 루즈벨트가 지지해주는 덕분에 팽창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세 명의 리더가 만나다, 얄타회담

1943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은 차이점을 조율하기 위해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회담을 갖는다. 이 회담에서는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 선언, 소련의 동부전선 반격에 호응하는 제2전선의 결성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각국의 정상들은 ' 각국간의 서로 협력을 통해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명제에는 뜻을 같이한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방측은 유럽 내에서 홀로 독일군과 맞서고 있는 소련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 해야했다. 소련은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독일의 주력부대를 상대했기에 스탈린의 발언권은 상당히 강력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발칸3국을 소련의 세력권으로 만드는데 동의해야했으며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 커즌선을 서쪽으로 옮기는 점에 대해서 허용해야만 했다. 제2전선 문제도 바로 이 테헤란 회담에서 논의되었는데, 스탈린은 유럽 내 제2전선 형성을 통해 독일의 주력군을 맞서고 있는 독일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요구했다. 처칠과 루즈벨트도 제2전선을 형성한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했고 세부적인 사항에서 스탈린과 의견충돌이 발생했으나 결국 스탈린의 제안대로 1944년 5월에 북프랑스 해안에 상륙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3국의 수뇌자들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조짐이 보이자 다시 한 번 회담을 가진다. 이 회담에서는 첫번째로 소련, 미국, 영국은 독일을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그의 Four Policemen 컨셉에 대한 소련의 동의를 열망했으며 처칠은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을 희망했다.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민주적 투표방식을 허용하는 대가로 루즈벨트와 처칠로부터 폴란드 동부 영토의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스탈린의 정의에 따른 민주적 투표방식은 루즈벨트나 처칠이 이야기했던 투표와 차이점이 있었고 결국 스탈린주의 공산주의 정부는 동유럽 전역에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타 회담은 전후 질서의 근간을 설립했고 이는 연합국 사이에 자라나는 반감을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얄타회담 (1945.02.04~02.11)

최제환

하나고등학교 9기

Great! You've successfully subscribed.
Great! Next, complete checkout for full access.
Welcome back! You've successfully signed in.
Success! Your account is fully activated, you now have access to all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