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
(我에 대한 글임을 먼저 밝힌다.)
我.
이 한자가 무엇인 지 아는가? 중국어 시간에 간체자로 가장 많이 쓴 한자 단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흔한 단어이며, 이 세상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단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도, 위대하며,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그 영역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글은 "나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選擇(선택).
행복은 절대적일까? 아니면 상대적인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고, 부유하다고 행복한 것도,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기에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그렇기에 행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여, 행복이 상대적임을 말하려 한다.
그 전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 명예, 부동산, 명품, 대학의 색깔? 다양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며, 나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돈이 있어야 삶을 영위하는 것이며, 명품과 명예를 통해 상대적 우월감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choice)"이다. 다소 모호하며, 추상적인 것이지만,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한 번 이 글을 읽기 전까지의 여러분들의 삶을 돌아보라. 수많은 갈림길에 놓였고, 수많은 선택을 했고, 그에 대한 수많은 후회와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여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의 인생을 바꾼 가장 중요한 선택은 하나고에 지원서를 넣는 바로 그 선택이었다. 상대적으로 학군이 덜 형성된 지역의 중학교에서 하나고를 온다는 것 자체에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결국은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다.
합격통지를 받은 1월 4일. 그로부터 9개월이 흘렀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내 인생엔 정말 엄청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긍정적인 것에는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뿐이다.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룸메이트들과 잊을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으며, 우리를 잘 이끌어주시는 선생님들에게 의지도 많이 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부정적인 것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하나하나 고장나는 것을 느낀 다는 것 그것 뿐이다. 하나고를 선택하고, 합격하여 다니는 이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나의 근본적 자아를 건드릴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의 선택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그때 그 지원서를 넣는 선택이 아니었다면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원서를 넣지 않았더라면, 다른 누군가가 합격을 했을 것이며 그 누군가는 이 학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서 또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어떤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정말 감사한 선택, 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꿀 정도로 중요한 선택이 있는가? 대부분이 있을 테지만, 그러한 엄청난 선택이 없을 지라도 우리가 삶 속에서 하는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의사결정에 부모님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그것이 부모님의 인생이라고 하지 마라. 선택과 결정을 한 것은 나 자신이고,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임을 잊지 마라.
이러한 생각에서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며, 나의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왜 행복이 상대적인가?
幸福(행복)은 相對的(상대적)이다.
우리 삶의 주체는 우리이고, 선택을 하는 것은 우리이다. 우리들은 같은 갈림길 속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것이며, 선택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엔, 우리들을 각기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선택을 하기에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다르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절대적 행복을 향하는 정해진 선택과 결정이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무언가를 향하는 정해진 길과 선택은 없고, 그렇기에 행복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고 우리들의 선택과 결정에 만족해아 하는 것 뿐이다.
지금까지는 상대적인 행복과 그것을 향하는 우리들의 작은 선택과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你(당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타인과 교류하고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그런 사회적 존재이며, 타인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없어도 나 자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보아라.
당신은 당신의 모습을 원래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눈은 우리들의 앞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얼굴과 등은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박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요?"
맞다. 거울을 통해서는 우리 신체의 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우리들의 원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거울을 통해 비춰진 내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없는데,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데도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타인이 우리를 바라봐 주고, 묘사해주기에 우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타인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근본적 존재와 기원에는 타인이 있다.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기보다는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이며, 의무라 감히 할 수 있을 것이다.
MySelf.
나, 이 세상 무엇보다도 존엄하며, 고귀한 것이다.
나 자신을 믿는 것.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장범준 가수의 '회상'이라는 노래의 가삿말 일부를 수록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 지네
마음은 얼고 나는 그 곳에 서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
마치 얼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놀라서 있던 거지
달빛이 숨어 흐느끼고 있네
떠나버린 그 사람 생각나네
돌아선 그 사람 생각나네
묻지 않았지 왜 나를 떠나느냐고
하지만 마음 너무 아팠네
이미 그대 돌아서 있는 걸
혼자 어쩔 수 없었지
미운 건 오히려 나였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