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시가 그리는 이별, 그리고 연결 : [푸른 밤]과 [그의 사진]
나희덕의 시 세계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사랑”이 적당할 것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연을, 따뜻한 모성을, 짧은 교직 생활에서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사랑으로 이야기한다. 사랑으로 바라본 세상에서 독자들은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고, 이별도 중요한 사랑의 단계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이들이 이별을 노래했다. 나희덕 역시도 이별을 시에서 여러 번 다루었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푸른 밤]도 그렇다. 2004년 발표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 실린 [푸른 밤]은 임의 부재를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별하면 떠오르는 시인의 다른 시가 있다. 2009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에 실린 [그의 사진]이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푸른 밤]과의 연결성 때문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푸른 밤]이 이별이라는 소재를 통해 임과 화자 사이의 연결을 시사하고 있다면, [그의 사진]은 그 연결성을 전제로 이별의 상황이 화자에게 가지는 중요한 시사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밤]을 읽은 이들은 이별에 대한 시를 읽었음에도 눈물 나는 슬픔이나 단단한 체념에서 비롯된 안타까움 대신 모종의 애틋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그 감정은 이별의 상황이 아니라 화자와 임의 강한 연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에서 화자는 임과 떨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임과의 연결을 강조한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화자는 스스로가 임에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며, 언젠가는 임에게 반드시 닿을 것이라 확신하는 어조로 이야기한다. 직접 운명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운명론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화자의 말과 화자와 임을 갈라놓고 있는 “수만 갈래의 길”이 독자들로 하여금 애틋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결국 [푸른 밤]의 핵심은 시인이 이별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시에서 분명 화자와 임은 함께 있지 않지만, 둘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연을 보자.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화자 위에 뜬 별도, 화자가 마주친 꽃들도 화자와 임을 연결하는 매개로 표현되고 있다. 나희덕에게 이별은 연결이다. 떨어져 있는 화자와 임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그의 사진]에서 더 나아간다. 시인은 이별이 남겨진 화자의 내면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이야기한다. [그의 사진]에서도 역시나 시인과 임은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남아 화자와 임을 연결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시인이 공을 들여서 임과 화자의 연결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진”이 그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사진”은 이별의 상황에서도 임과 화자를 이어주는 매개이다.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마르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실은
남아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그”의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워지지만, “그”와 화자의 연결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임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는 구절이 말해주듯이, 때로는 물리적 단절이 임과 화자의 연결을 강하게 해줄 때도 있다. 물리적 제약을 받지 않은 임과 화자의 연결은 오히려 임의 부재를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시가 실린 시집 “야생사과”에서 시인은 비워짐과 낯선 깨달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집에서는 야생사과, 즉 열매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다음을 보자.
남아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사진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사진을 보며 거실에 들어서는 날들,
그 고요 속에서
겨울 열매처럼 뒤늦게 익어가는 것도 있으니
평화는 그의 사진과 함께 늙어간다
“겨울 열매”는 이 열매, 야생사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집에서 야생사과는 깨달음이다. 이별의 상황에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필자가 정태건, 홍서연과 함께 Insomniac Magazine 블로그에 개재한 [시를 듣는 방법 ep.1]에서 필자는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사람과 영원히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어째서 “그의 사진”이 “그”보다 집을 잘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화자와 임의 연결이 강해질수록 이별이 크기도 커진다. 정태건의 말을 빌리면, “어떤 ‘없음’은 ‘있음’보다 크다.” 화자는 이별의 상황에서 임이라는 존재의 세기를 다시 느낀 것이다.
“그”에서 “사진”으로 초점을 옮겨보자. 나희덕은 최근 발표한 수필 “사라진, 또는 사라져가는 얼굴을 위하여”에서 사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시인은 사진이 가진 제의적 가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진은 대상이 “거기에 있었음”을, 또는 “아직 살아있음”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얼굴을 찍을 때는 대상을 더 잘 포착하기 위해 피사체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그 사람다움이 가장 잘 발현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사진에 나타난 얼굴의 표정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찍힌 사진은 그 사람이 없어지거나, 현재의 그 사람이 없어서 나이를 먹고 나서 아직 사진 속에 그 사람이 살아있음을 그 어떤 매체보다 잘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 사진은 본질을 향해 다가가게 해주는 매개이다. 시인은 수필에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번역한 김진영의 다음의 말을 인용한다.
사진은 말하자면 부재 속의 실재라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이 기술적으로 그러나 마술적으로 구현된 이미지[이다].
어떤 사진은 대상의 파편만을 담고 있지만, 어떤 사진은 대상 전체를 보게 해준다. 따라서 사진은 단지 순간의 상을 담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그 사진에 대상의 “존재를 이루는 가능한 모든 술어들이 결집”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실재하는 대상보다도 실존에 가까운 것이 되기도 한다. “부재 속의 실재”나 “있을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사진은 대상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다. 임은 없지만, 사진은 영원히 화자와 함께 있다. 사진은 화자에게 임을 완전하게 이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보다도 집을 잘 지키는 “그의 사진”처럼 말이다.
이별에 쉽고 어려운 정도를 메길 수는 없지만, 굳이 측정하고자 한다면 나희덕이 이야기하는 이별은 분명히 어려운 쪽일 것이다. [시를 듣는 방법 ep.1]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이별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함께여서 힘이 되지만, 함께이지 않아서 고통스럽다.
[푸른 밤]에서, 그리고 [그의 사진]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이와 있을 수 없지만, 완전히 외면해 버릴 수도 없다. 오히려 단절이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나희덕의 시가 그리는 이별은 연결이다. 그리고 연결을 넘어 연결된 대상의 더 완전한 이해다. [그의 사진]에서 화자가 “그의 사진”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임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을 수도, 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별을 대하는 많은 방법 중에서, 화자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이 이별은 어려우면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떨어져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고, 이별도 중요한 사랑의 단계이다. [푸른 밤]과 [그의 사진]은 이를 말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