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조금이라도 책을 가까이 한 사람이라면, 혹은 어딘가의 자극적인 매체들의 입방아에 귀 기울여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의 제목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걸작, "인간 실격"이라는 책을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사실 이 책을 읽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한 편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 이 책을 접하고서 읽어보려 했을 때, 이 책을 구매해 달라는 나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그래서 고등학생으로서 이 책을 다시 접했을 때, 약간의 기대와 두근거림이 함께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단 날 매료시킨 것은 제목 그 자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 '실격'. 타인에게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예는 자주 볼 수 있다. 뉴스를 보며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놈, 인두겁을 쓴 년이라며 홀로 판단을 내리고는 정당한 결정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인간으로서 실격이라 정의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아의 재정의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금수와 동급으로 여기는, 자기파멸적인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요조(그리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를 책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이 한 마디로 수기를 시작하고 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세 개의 수기를 거치며, 스스로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요조가 인간으로서 실격인가? 어려서부터 익살로써 남들을 웃기고자 하며,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정말로 실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실격인가. 요조인가? 혹은 요조를, 아니 다자이를 죽게 한 인간들과 그들의 사회인가.
도시의 번영과 인간의 소외
요조는 늘 술집을 찾아 헤맨다. 집에서도 대가족이었고, 그를 찾는 여자도 많았던 요조는 늘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렇지만 수기 전반에 걸쳐 팽배하는 우울감과 불안의 잔향은 우리로 하여금 되묻게 한다. 왜 이리도 이 도시는, 사회는 싸늘해 보이는 것인가.
사회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김승옥(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의 작품 "서울, 1964년 겨울"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번화하고,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물든 이기주의, 불안과 외로움. 요조는 결국 이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 어떤 연기로도, 가식으로도, 재물로도 결국 요조는 이 사회의 이면에 스며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좌절감을 외부로 표출하기보다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에너지로써 쏟아붇는다.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 어울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비정상으로 규제하고 억압한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홀로 고독했다.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와중에도 그는 자기파멸적인 싸움을 계속했다. 사회를, 인간들을 바꾸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는 편을 택했다.
인간의 자격, 인간 실격
'실격'이라는 말에는 필연적으로 필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자격'이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면 합격, 미치지 못하면 실격이 된다. 그렇다면 요조, 그리고 다자이는 인간의 자격을 무엇으로 본 것인가? 나는 정확히 확신할 수 없다. 요조의 몰락은 그가 느끼던 인간에의 공포가 낳은 산물이다. 그리고 마약과 술, 여자, 자살시도로 얼룩진 스스로의 인생을 보며 그는 자신을 '비인간적'이라고, 인간으로써 '실격'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조의 결말만을 두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는 살고자 했다. 살아내고자 했다.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에게 내재해 있던 동족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적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만의 잘못인가? 아니, 도와주지 못한 사회의 허물이며 그와 같이 여린 영혼을 감싸주지 못한, 알아차리고 손 내밀지 못한 인간들의 잘못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 무지한 이들은, 방관자들은, 인간으로서 합격인가.
혹은 실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