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속하지 못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철학 2021년 06월 06일

         멈출 수 없는 차에 탄 당신은 갈림길을 마주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왼쪽에는 당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움직일 수 없는 채 서 있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핸들을 꺾겠는가? 이런 경우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왼쪽으로 차체를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을 조금 바꾸어 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조난을 당한 상황, 이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차가 도착했다. 소방차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갈 수 있으나, 단 한 사람만은 남아야 한다. 당신은 기꺼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렇다고 답할지 모른다. 그럼 다시 묻겠다. 남아야 하는 단 한 사람이 당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그 대답은 ‘Yes’인가?

모두가 꺼려 하던 이야기, 전체주의의 이면을 묻다

         “날씨의 아이(2019, 신카이 마코토)”는 위와 같은 질문에 ‘No’라고 답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집을 나와 도쿄로 상경한 주인공 ‘호다카’는 경찰에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비를 멎게 하려면 하늘에 ‘히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히나가 사라진 순간, 맑아진 도쿄의 하늘을 뒤로하고 호다카는 달리기 시작한다. “상관없다고! (중략) 맑은 날 따위 두 번 다시 못 봐도 괜찮아! 푸른 하늘보다 나는 히나가 좋아! 날씨 따위.. 계속 미쳐 있어도 돼!” 그는 구름 위에서 다시 만난 히나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날부터 삼 년간, 도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리게 된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20세기 초반, 파시즘, 나치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있다. 초반에는 이들 사상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이후에는 그 정의가 다양해져 일반적으로 개인주의와 대립되며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사상으로 대변될 수 있으나, 보통의 경우 이러한 생각에 반대할 만한 큰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다수의 행복을 소수의 희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공리주의와도 그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날씨의 아이”에서 호다카의 선택은 이와 상충되는 것이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하는 상황, 호다카는 세상을 등지고서 그녀를 선택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인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말들은 소수의 희생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잊히곤 한다. 마치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외라는 듯, 인권의 기본이라고 여겨지는 ‘생존권’조차 외면당한다. 모두를 위해 하나가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이야기되는 세상. 신카이 마코토는 이 조작된 ‘당위’의 수면에 작은 조약돌을 던졌다. 어쩌면 기별도 가지 않을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

할 수 없기에 해야 했던 이야기

         “날씨의 아이”가 개봉하던 2019년, 일본은 대형(직경 1,400km) 태풍 ‘하비기스’의 영향으로 약 150억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비록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삼 년간 줄곧 비가 내린 도쿄 역시 그 피해가 상당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집을 잃고, 재산을 잃고, 아까운 목숨을 잃었으리라.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이 불러온 대가는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실제 현실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으면서도 전체주의에는 선뜻 반기를 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작품이 하나쯤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정치인이나 언론이 공적인 자리에서 쉬이 던질 수 없는 화두이기에, 이런 영화 하나쯤 필요한 것이 아닐까.

         “황홀하게 뜬구름 잡기”**, “맥 없이 재활용하는 전작의 모티브들, 심지어 단점까지도.”*** 그러나 이러한 혹평만을 보고 단념하기에는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스로도 전작인 “너의 이름은.(2016, 신카이 마코토)”보다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 그의 세 배에 달하는 제작비를 들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묻고 싶었던 간절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날씨의 아이”에게는 분명 한 번쯤 보아야 할 영화적 가치가 있다.

이 세상을 걸고서라도 꼭 함께하고 싶은 사람, 당신에겐 있나요?


*[네이버 지식백과] 전체주의 [totalitarianism, 全體主義] (두산백과)

**박평식 평론가

***이동진 평론가

Great! You've successfully subscribed.
Great! Next, complete checkout for full access.
Welcome back! You've successfully signed in.
Success! Your account is fully activated, you now have access to all cont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