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안에 이해하는 프랑스 혁명

역사학 2021년 05월 31일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파리, 루브르 미술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인류 역사를 뒤흔든 혁명을 몇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17 러시아 혁명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중 프랑스 혁명이 현대 인류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어떠한 배경에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프랑스 혁명이 현재 사회에 미치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프랑스 혁명의 배경: 앙시앙 레짐 체제

프랑스 혁명은 어떤 하나의 우연적 상황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결코 아니다.  중세 시대부터 프랑스에서 존재했던 신분질서, 앙시앙 레짐 체제로 인한 하위 계층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로 보아야 한다. 프랑스는 천 년 가까이 제 1신분(성직자)와 제 2신분(귀족), 제 3신분(노동자, 상인 계층, 농민)으로 구성된 앙시앙 래짐의 위계질서를 유지하였다. 특권층이었던 제 1신분과 2신분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였으나 프랑스 전체 토지의 30%를 차지하였고, 세금 부담을 지지 않았다. 하위 계층인 제 3신분은 국가 세금의 절반 가까이를 부담하였다. 아래 그림은 앙시앙 레짐 체제에서의 제3신분을 제1신분과 2신분을 업고 가는 노인으로 표현하여 프랑스 혁명 전까지 제 3신분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앙시앙 래짐을 풍자한 그림 (출처. 중부일보)

이러한 앙시앵 레짐 체제에 대한 제 3신분들의 불만은 18세기 계몽사상이 확산되면서 커져만 갔고, 본격적으로 제 3신분 중 막대한 부를 얻은 상업 계층,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구체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정치적 움직임이 시작된다.

(2) 귀족들이 혁명을 시작하다

프랑스 혁명은 제 3신분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프랑스 왕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제1,2신분이 불을 지폈고, 그 후 제 3신분이 혁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우선, 제 1,2신분이 왕정에 반발한 배경을 살펴보자. 1789년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1,2신분에게 과세를 명했고,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1789년 5월 프랑스의 전국 신분회의이었던 '삼부회'가 열리게 된다. '삼부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제1, 2, 3 신분 각각의 대표가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의회 기구로 볼 수 있다. 이때, 삼부회에서 표결은 신분별로 진행되며 한 안건에 대해 세 개의 신분 중 두 개의 신분이 찬성해야 그 안건이 통과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신분별 표결 시스템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제3신분이 어떠한 안건에 대해 찬성을 내도 제1,2 신분이 반발하면 제 3신분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제 3신분은 표결 방식을 바꿔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제 3신분이 삼부회를 이탈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3) 혁명의 본격적인 전개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동시에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귀족들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프랑스 전국은 공포의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대공포(Great Fear)의 상황을 목격한 국민의회는 전면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다. 1789년 8월 4일 프랑스 민중들을 천 년간 괴롭혔던 봉건제 폐지를 선언한다. 1789년 8월 26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한다. 인권선언은 자유, 평등, 우애의 3원칙을 중요한 가치로 설정하였다. 이후 봉건제 하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교회의 특권이 폐지되었다. 국가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91년 헌법이 완성되면서 국민의회 시기에서 입법의회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입법의회 시기 혁명 세력은 왕정을 지지하는 푀양파와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코뱅파로 나뉘게 된다. 자코뱅파 내에서도 온건파인 지롱드파와 강경파인 격양파, 로베스피에르파로 갈리게 된다. 입법의회 초반 정국은 왕정을 지지하는 푀양파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1792년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오스트리아와 일어난 전쟁에서 패배하자, 프랑스 민중들은 패전의 책임을 루이 16세로 돌리게 되고 루이 16세의 왕권은 정지된다. 자코뱅파의 집권이 시작된 것이다.  1792년 9월 22일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보통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민공회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국민공회 시기 집권 세력이었던 자코뱅 파에서도 국왕을 사형시킬지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온건파인 '지롱드파'는 국왕 사형을 반대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된 강경파는 국왕 사형을 찬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을 사형해야 할지를 두고 고 의회 내에서 표결이 이뤄졌고, 과반수 이상이 국왕 사형에 동의하면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처형되게 된다. 이때부터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프랑스 민중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루이 16세의 사형을 찬성하고 국민공회의 강경한 행보를 지지했던 파리의 시민들과 다르게, 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은 지방의 민중들은 이러한 행보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방의 민중들이 반 프랑스 혁명을 외치는 방데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자극을 받은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세력에 반대되는 모든 이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하였으며, 수많은 온건파와 왕당파들이 혁명재판소에서 즉결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와 동시에 모든 프랑스 국민의 보통선거권을 보장하는 보통선거를 규정한 1793년 헌법을 제정하고, 혁명력을 채택하는 등 과감한 개혁의 행보를 보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신속한 사형 집행을 위해 사용된 단두대 (출처. 크리스천 라이프&에듀 라이프) 

(4) 상실된 혁명의 동력

국민공회 시기 자행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낳았으며, 결국 1794년 7월 반 로베스피에르파 위원들이 로베스피에르를 축출하면서 공포정치는 막을 내린다.  이를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반 로베스피에르파는 로베스피에르가 시행한 개혁 조치를 철폐하면서 민중들의 개혁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혁명의 동력이 상실되는 시기로 접어든다. 1799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혁명정부는 종식을 고하게 되면서 프랑스 혁명이 끝난다.

공포정치를 시행한 로베스피에르, 그의 행보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출처: 위키백과)

(5) 나의 생각

프랑스 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반영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문명이 시작하고 수천 년 가까이 지속된 위계질서에 대해 인류가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대항을 하기 시작한 징후를 보인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화정이 추구했던 가치들은 현재 대다수 국가의 헌법에 채택되었으며, 민주 공화국의 존속을 유지하게 하는 기본적 적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은 항상 피를 수반한다. 혁명이 이룩한 광대한 성과에는 단두대에서 잘려 나간 수많은 머리들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위대한 인류의 성취 속에서 희생당하는 무고한 민중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A tale of two cities>에서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인공은  단지 귀족의 자제라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민중들은 순식간에 이성적 판단 없이 서로를 증오하고, 살해한다. 그러한 점에서 당시 시기를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 믿음의 시절이자 의심의 시대'로 지적한 찰스 디킨스의 첫 문장은 프랑스 혁명의 양면성에 대해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 찰스 디킨스, 'A Tale of Two Cites'의 첫 문장

이러한 혁명의 양면성은 오늘날에게도 큰 함의를 던져준다. '개혁과 사회 정의를 위해 때로는 비인간적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가?'  '혁명과 일반적인 집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이 현재의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1789년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과정들은 '반란' , '폭력 운동'으로 규정되지 않고 '혁명'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다. 오늘날 일어나는 여러 시위, 운동들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 수단이 평화적이었다 하더라도, 후대에 미친 영향이 제한적이었다면 그저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후대에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라면 '혁명'과 같이 인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혁명'과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을 구분하는 기준은 '후대 인류에 미친 영향의 유무'로 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러한 논의에 대한 본인만의 주관을 형성한다면 향후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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